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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원수는 네가 반드시 장한 뜻을 성취시키고야 말 줄로 나는 믿고 있으니까, 내가 친히 그 일에 손

을 댈 필요까지는 없을 줄 안다. 또 솔직히 말해서 이 노부의 무학 정도를 가지고는 무영객의 적수

가 될 만한 실력도 없다. 이 점도 아울러 양해해 주기 바란다.”너무나 간곡하고 성실하고 솔직한

고백이었다.검정 복장의 사나이는 상대방을 나무랄 털끝 만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정기봉에

대해서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더한층 위대한 용기를 돋우어 주는 것 같았다.

정색을 하고 정중한 태도로 결연히 대답했다.”이 조카가 비록 불민하고 부재(不才)의 몸이라 하

오나,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토막이 난다 해도, 어버이의 원수는 갚고야 말겠습니다. 여태까지 돌

봐 주신 아저씨의 은혜가 태산 같거늘, 어찌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또다시 아저씨를 괴롭혀

드리기야 하겠습니까?””그렇게까지 이 노부의 입장을 이해해 준다면 정말 대견한 일이다.”

정기봉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하다는 듯, 위엄 있는 음성으로 다음 말을 계속했다.”그러면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이 두 가지 너의 부친의 유물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 보존해야 한다. 또 이 물

건들이 우리 봉명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가는 이 노부

의 몇 해 남지 않은 여생마저 유지해 나가기 어려울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 ‥‥‥”말끝이 차

츰차츰 흐려지면서, 석실 안은 또다시 죽음같이 고요해졌다.제단 오른편에 앉아 있는 정기봉은

시종 여일 몸을 꼼짝도 하는 법이 없었다.검정 복장의 사나이는 천기부록이라는 책자를 품속에

집어 넣고, 장검도 허리에 찼다. 저편을 향하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정기봉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그러면, 이 불민한 조카는 물러가겠습니다. 두 가지 물건을 아저씨께서 저에게 물

려주셨다는 사실은,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말을 마치자, 또 한 번 읍을 하

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도 저편을 향하고 앉아 있는 정기봉의 상반신은 꼼짝달싹도 하

지 않았다.검정 복장의 사나이는 새삼스럽게 수상 쩍다는 생각이 불끈 치밀었다.’이상한데? 저

상반신도 가짜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야, 여태까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몸을 꼼

짝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사람이 마지막 고별의 인사를 하는데도, 고개조차 돌이켜 보지 않

을 수 있을까?’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 순간에 있어서 그에게는 이런 문제가 그다지 중대

한 것은 아니었다.그래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려 하지 않고, 즉시 돌아서서 석실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통로를 꽉 막고 있던 쇠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 것도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 자못 홀가분하고 시원스런 기분으로 봉명루에서 빠져 나왔다.그런데 한 가지 괴상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