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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룡에게 말했다.”오빠! 바쁜 일이 있다고 하잖았어? 왜 얼른 가지 않고 어물어물하고 있수?”

정여룡은 한편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눈을 아래로 스르르 깔아서 실눈을 하고 능청스럽게 대

꾸했다.”나‥‥‥나‥‥‥별로 바쁜 일도 없다! 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저 친구들이 가서 대신하

면 될 일이니까‥‥‥ 내 누이 동생의 손님이 오셨는데 내가 오라비의 입장에서 모른 체하고 매정

스럽게 달아날 수야 있겠니? 남들이 알면 예의 범절을 모르는 쌍놈이라고 할 테니‥‥”자운 아가

씨는 입을 삐쭉했다. 혓바닥을 낼름 내밀어 보였다.”오빠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 범절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 흥!”그런데 강주 아가씨가 천만 뜻밖의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정 선

생은 마음씨가 참말 너그러우신 분이세요! 언니! 우리 다같이 함께 좀더 이야기해 보는 것도 재미

있지 않겠어요?”자운 아가씨는 내심 기가 막혔다.’이 천둥 벌거숭이 같은 계집애야! 우리 오빠란 작

자의 엉큼스럽고 내숭스런 심보도 알아채지 못하고, 함부로 까불고 있다니! 참‥‥’정여룡이 대뜸

싱글벙글하며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그거 참 좋은 말씀이시오! 난 여기서 아가씨를 모시고 재미있

게 이야기해 보고 싶소!”다음 순간에 정여룡은 갑자기 씽끗 멋적게 웃으며 자운 아가씨에게 말했다.

“얘! 자운아! 넌 정말 맹꽁이다. 응당 이 아가씨가 누구시라는 것을 정식으로 나한테 소개해 줬어야

할 게 아니냐.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건 순서가 뒤바뀌었구나!”자운 아가씨는 도무지 마음에 내

는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명색이 자기의 친오빠고 보니, 강주 아가씨의 면전에다 놓고 망신을 줄

수도 없는 형편인지라,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억지로 대답했다.”이 아가씨는 서울 장안에서도 유

명하신 왕 대인(王大人) 댁의 천금같이 귀하신 강주라는 아가씨예요! 그러니까 오빠도 좀 점잖게

굴란 말야!””왕 대인이라고?”정여룡은 한참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구문 제독(九門提督)의 벼슬

자리에 계신 왕유영(王維英)이란 분 말이오?””그래요. 바로 맞았어요!”강주 아가씨는 어린 아이같이

깔깔대고 웃으면서 애교를 떨고 대답했다. 그리고 되물어 봤다.”봉명장의 둘째 장주님께서도 전부

터 우리 가친을 잘 아셨나요?”정여룡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나서야 대답했다.”초개 같은 일

개 범부가 어찌 높은 벼슬 자리에 계신 분을 잘 안다고야 하겠소만, 소생도 일찍부터 왕대인께서는

이미 연만하시어 멀지 않아서 벼슬을 내놓으시고 호남 땅으로 돌아가시리라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소!””네, 그게 사실예요!”